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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상이 될 길의 기록

이순신길 01 - 초량해협 본문

이순신길 - 남해바닷길

이순신길 01 - 초량해협

경기병 2017. 11. 7. 10:41

해를 따라 서쪽으로 간다.

불멸의 삼도수군통제사 충무공 이순신(李舜臣 1545~1598)장군께서 살다가신 그 바닷길을 잇는다.

 

 

초량목해전 (1592.10.05)

초량목은 지금의 부산세관 부근으로,

화준구미, 다대포, 서평포를 거치면서 적선 24척을 격파한 장군은 초량목에 도착한다.

척후선을 보내 적정을 살핀 다음, 적 대선 4척이 바다로 나오자 이를 단번에 격파하였다

 

 

 

 이순신길 01-1 승두말에서 초량 (2017.11.04)  「초량목해전길」

이순신길 시작점 - 승두말 (부산시 남구 용호동)

 

 

해파랑길을 끝내지도 못한 상태에서,

해파랑길에서 만난 인연들이 남해안길을 잇는다기에 다짜고짜 끼여들었다.

04시40분 해운대수도권터미널에서 서울서 내려오는 종주대를 기다린다.

 

홀로 걸은 해파랑길은 너무도 따분하고 심심했다.

하지만, 산에서 스치는 무리들을 볼 때 마다 한국의 떼거지리즘에 환멸을 느꼈다.

 

길은 혼자서 간다.

근데, 문제는 빈약한 의지였다.

충분히 더 나아갈 수 있는데..., 따분해지면 시점으로 간 여정의 보람도 없이 이내 돌아서 집으로 오곤 했다.

 

 

추워서 떨었는지? 낯선 사람들과의 동행에 따른 어색함에 떨었는지?

좌우지간 떨고 있으니, 종주대가 왔다.

 

 

 

승두말에서 바라 본 오륙도

 

 

2주전 통일전망대에는서 북한을 보고 절을 하더니, 오늘은 일본을 보고 절을 했다.

그들만의 샤머니즘이었다.

이제 나도 떼의 구성원이 되었기에 어쩔 수 없었다.

 

07시15분,

부산시 남구 용호동 승두말에서 이순신길 첫 걸음을 뗐다.

 

 

 

 

 

신선대부두

 

 

 

UN공원을 잠시 탐방하고, 감만동교차로로 내려왔다.

 

부산...,

태어나고 성장하고 그리고 여태껏 살고 있다.

 

이 도시의 길을, 길에서 만난 사람들과 걷는 기분이 사뭇 남다르다.

 

 

 

 

 

동천삼거리

 

컨테이너를 실은 대형트럭들이 생생 내달리는 충장대로는,

아마도 혼자 걸었다면 나는 당장에 길을 접고 집으로 돌아 갔을 것이다. 

 

 

 

 

 

12시에 영도다리가 도개를 한다고하니 몇몇이 그 곳으로 줄행랑을 친다.

남은 사람들끼리 가장 부산스런 풍경속을 느긋하게 걷는다.

 

처음엔 길보다는 사람이 먼저 보일거라 했다.

맞았다. 길도 풍경도 외면한 채 사람과 어울리는게 오늘 길의 전부다.

 

 

 

해파랑길에서 만난 사람들-1

 

해파랑길에서 만난 사람들-2

 

 

혈연, 지연, 학연...,

그런 식상한 인연의 고리를 떼어낸 인연을 홀로 걸은 해파랑길에서 만나고 싶었다.

 

바램은 50코스에서 이뤄졌고,

어쩌면 그 인연을 붙잡고자 이 길에 들어선건 아닌지? 싶다.

 

 

 

부산대교 가는 길

 

 

12시25분, 구.부산연안여객선터미널부근 수미르공원에 닿았다.

부산이 가장 부산스럽게 다가왔다.

 

10여분을 쉬고, 영도로 건너가는 부산대교로 향했다.

 

 

 

 

 

 

 

 

한반도 최초의 연륙교는,

1934년3월 개통한 영도다리라 불리우는 영도대교였다.

 

정오, 싸이렌 소리와 함께 교량의 상판이 도개를 하면,

굴뚝이 높은 큰 배들이 해협을 가로질렀다고..., 엄마는 이 곳을 지날 때 마다 옛날을 읊었다.

 

 

절영도해전 (1592.10.04)

부산포에 주둔한 일본군을 멸하기 위한 조선 수군의 4차 출전 중,

지금의 영도 앞바다에서 적선 9척을 침몰시킨 해전이다.

 

 

 

 아리랑길 001 - 영도1 (2017.11.04)  「절영도해전길」

태종대 해안

 

여지는 연륙교들로 인해 배를 타지 않고도 입,출도가 가능한 섬들이 속출하는 작금이다.

 

이 길에서 연륙교를 건너 만나는 섬 길을 아리랑길이라 칭하며,

가급적 그 섬 길 또한 이을것이다.

 

 

 

 

부산대교에서 바라 본 부산항대교

 

 

 

 

봉래동 부둣가는 늘 그렇듯 그런 풍경이다.

바다에 흩어진 난장판, 무질서하게 정박된 중대형 어선들, 간혹 보이는 주정뱅이 술꾼들, 답답한 가림막...,

 

그 거리를 지나, 청학119안전센터 주차장에서 점심이랍시고 주전부리들을 먹었다.

얼마가지 않아 길가 난전에서 오뎅 꼬치를 들고 선 종주대를 본다. 

 

 

 

 

해양대학교 부근 도로에서 바라 본 오륙도와 승두말

 

 

 

태종대 입구

 

16시10분 태종대입구에 도착이 되었다.

 

관록의 형님,누님들은 벌써 도착을 해 태종대 순환 코끼리열차표를 알아보고 있었지만,

이미 당일 보행의 한계치에 다달은 나와 후미는 태종대네~ 했을뿐이다.

 

두 대원이 사라졌다.

나도 사라질까? 하다가..., 짜 모은 정신력을 오기로 전망대로 향하는 일행을 앞서 나갔다.

생물학적으로는 내가 제일 년식이 짧잖아~

근데, 사람 죽겠더라~

 

 

 

 

 

 

태종대전망대

 

약8시간, 약26km를 걸어 태종대전망대에 닿았다.

 

별다른 풍경도 없는 도심의 보도에 불과한 길을 이렇게까지 걸을 수 있나..., 싶었다.

앞으로의 길에서 오늘이 계속된다면 과연 내가 버틸 수 있을지? 의문도 들었다.

 

전망대에서 내려다보는 영도바다는 그래도 일품이었다.

 

 

 

 

 

 

 

감지해변으로 내려와 평소 존재조차 몰랐던 영도 남부해안의 산길을 따라가니 중리바닷가가 나왔고,

천마산쪽으로 해가 지고 있었다.

 

지척이 집이지만, 집이 그리워지는 시간이었다.

 

 

 

 

 

 

75광장으로 오르는 계단

 

 

영도남부해안 중간쯤에 위치한 75광장에서 대열이 멈췄다.

영도다리를 건너 자갈치까지 가야하는데...,

 

들뜬 기분에 점심을 소홀히 해 몇몇 형님들이 저혈당을 호소했다.

더 걷지 않기를 바라며, 속으로 쾌재를 외쳤다.

 

결국, 시내버스를 타고 영도를 빠져 나왔다.

그로헤서 이순길1회차1일째는 끝이났다.

사람 죽는줄 알았다.

 

 

 

 01-1회차 - 승두말→75호광장 (2017.11.04) 「초량목해전길」이순신길 01-1회차 - 승두말→75호광장 017.11.04)

 

 

 

04시30분, 깨워졌다.

내가 이 시간에 왜 일어나야하는지?

오늘은 일요일인데...,

 

거역이 안되는 나이차로 인해 개길수도 없고..., 비몽사몽이었다.

어제 저녁에 그래 씻고도 또 씻는다고 다들 분주하시다.

난 어제도 씻지 않았고, 오늘도 씻을 생각이 없는데 씻어라신다.

잠이 와 죽겠는데, 씻어야 한다는 것은..., 

 

 

부산포해전 (1592.10.05)

전라좌수사 이순신은 한산도와 안골포해전을 통해 제해권을 장악했다.

일본군의 근거지인 부산을 공격해 일본군의 본국과의 연락을 두절시키기 위해, 그해 8월 24일에 부산포로 향했다.

10월 1일에 조선의 연합함대 166척은 화준구포·다대포·서평포·절영도 등을 거치면서 적선 24척을 불지르고,

이어서 일본병선 470여 척이 줄지어 있는 부산포 내항으로 거북선을 앞세우고 전함대가 돌진했다.

이때 우부장 정운과 거북선돌격장인 이언량을 비롯하여 전부장 이순신(李純信)과 중위장 권준, 좌부장 신호 등이

앞을 다투어 적선을 불태우며 쳐들어가 일본전선에 있는 적병을 쳤다.

그러자 배에 탄 군사들과 육지 위의 일본군들이 산으로 도망쳐 올라가 총포와 화살을 난사했고,

조선군은 적선을 쳐부수었다.

이순신은 상륙하여 싸우려다 불리할 것으로 판단, 적을 완전히 섬멸하지 않은 채

일본병선 100여 척만을 파괴하고 함선을 가덕도 방향으로 돌려 동도(同島) 앞바다에 돌아와 진을 치고 밤을 새웠다.

이 전투에서 죽은 일본군의 수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반면, 조선군 피해는 6명의 전사자와 25명의 부상자뿐이었다.

이 전투에서 일본군은 본거지를 기습당했기 때문에, 그뒤 일본군은 해전을 꺼려 육상전으로 전환했다.

 

 

 

 이순신길 01-2 자갈치에서 다대포 (2017.11.05)  「부산포해전길」

암남반도 최남단 두도전망대로 가는 길

 

 

1시간만 가면 집인데, 자갈치시장에 있는 모텔에서 잤다.

내 살다살다 별 경험을 다 가진다.

 

05시 비워진 시장골목을 빠져나오는데,

노란솥에서 끓고 있는 선지국의 첫 국자뜸의 수혜자이고 싶었지만, 건의를 할 처지가 아니라서 닥치고 간다.

 

 

 

장사도 안일어난 일요일 새벽, 트레킹을 한다.

 

워밍업이고 나발이고, 다 필요 없다.

가자해서 간다.

 

 

  

 

 

비릿한 갯내음이 숨을 쉬며 40여분을 걸어 송도에 도착을 했다.

 

그 때의 송도해수욕장이 되고자 부단한 노력이 바다에 펼쳐져 있었다.

바다로 들어 가는 유리길, 네온이 감싸고 있는 방파제, 몸통 없이 바다에 쳐 박아 놓은 고래 대가리,

그리고 얼마전 운행을 시작한 해상케이블카까지...,

 

한 때 부산 최고였던 아성을 되찾고자, 송도해수욕장이 완전히 이성을 잃고 있었다.

 

 

 

 

 

 

 

해안볼레길로 접어들 무렵,

뒤에서 걷고 있던 누군가, '해 뜯다' 했고 고개를 돌리니 어제에 이어 또 오메가가 수평선에 나타나고 있었다.

 

 

 

 

 

 

 

07시쯤 해상케이블카주차장에 닿았다.

 

마늘쫑짱아치와 쪽파김치로 아침을 먹는데, 어찌나 그 맛이 좋던지! 물에 말은 흰쌀밥이 간절했다.

함께 걷는 길이 이래서 좋구나~ 싶었다.

 

 

 

 

 

훌륭한 아침을 먹고, 혈청소로 올라 암남반도의 최남단 곶으로 간다.

 

떼는 떼지만...,

그 간에 내가 보아 온 그런 류의 떼와는 차원이 달랐다.

대장인 해미누나와 형님들은 2대간9정맥 완주는 기본으로 가진 대한민국 최고의 트레커였다.

 

그 분들의 틈에 낀 내가 조금은 영광스러워졌다.

 

 

 

 

 

 

 

혈청소에서 두도전망대로 가는 길이 이렇게 좋은지 몰랐다.

 

왜 몰랐을까...,

아마도 혼자 걸었다면, 나는 틀림 없이 이 길을 빼먹고 바로 감천항으로 갔을 것이다.

 

 

 

 

 

 

감천동 산동네를 처음엔 한국의 마추피츄라고들 하다가,

진짜 마츄피츄를 갔다온 사람들이 하나 둘 늘어 '갔다 붙일걸 갔다 붙혀라' 하니,

최근에는 감천동문화마을이라 칭하고, 부산여행에서 꼭 들려야 할 탐방지로 지목을 한다.

 

산기슭에 옹기종기 지어진 집들은 벽과 담에 고유의 페인트칠을 해 살았다.

멀리서 보는 그 형상들이 조화를 이룬 이채감에 사람들은 그 곳을 파고들었다.

 

멀리서 보면 될 것을,

꼭 그 안으로 들어가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들 때문에 주민분들의 피해가 이만저만이 아니라고 한다.

 

제발 쫌...,

 

종주대는 그러한 내 바램을 아는지 그대로 감천문화마을을 지나쳐 두송반도에 접어들었다.

 

 

 

감천만 넘어 두도가 걸어 온 길을 가늠하게 한다.

 

 

 

 

좀 지루한 산길을 쭉 내려갔다, 좀 더 지루한 산길을 쭉 올라오니 장림바다가 보였다.

두송반도 둘레길이 장림동 해안도로에서 끝이 났다.

 

이제 다와간다.

 

 

 

 

야망대만 넘어서면 다대포다.

 

 

 

12시를 조금 넘긴 시간, 다대포항에 다달았다.

 

항은 '다대포어항문화축제가 한창이었고,

축제를 즐기는 인파속 저렴하게 팔고 있는 난전의 횟감이 시야에 들어왔다.

부산하면 회다.

모두들 횟감에서 눈독을 들이고 있었다.

 

어떼?

콜!!

 

1회차의 종점은 다대포꿈의낙조분수대였지만,

축제장에서 파는 회에 눈이 뒤집어진 종주대는 그 곳에서 종지부를 찍었다.

 

탁월한 선택이었다.

 

 

 

 

 

 

 

 남해안 해상교량 시리즈 1 - 부산대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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