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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상이 될 길의 기록

이순신길 24 - 해남반도(2) 본문

이순신길 - 남해바닷길

이순신길 24 - 해남반도(2)

경기병 2019. 6. 10. 10:27

해를 따라 서쪽으로 간다.

불멸의 삼도수군통제사 충무공 이순신(李舜臣 1545~1598)장군께서 살다가신 그 바닷길을 잇는다.

 

 

어란포해전 (1597.10.7)

어란포는 지금의 해남군 송지면 어란리이다.

장군께서 삼도수군통제사로 복귀후 치른 첫 번째 전투로,

칠천량해전의 대패후 남은 13척의 판옥선으로 적의 침입에 대비를 하던 중,

왜선 8척이 어란포에 출몰하자 이를 즉각 격퇴하여, 제건된 조선 수군의 사기를 높이는 계기가 되었다.

 

 

 

 이순신길 24-1 땅끝탑에서 송지천하류 (2019.06.01) 

어란진초등학교를 지키는 장군의 像

 

 

01시30분 광주 유·스퀘어터미널에 도착후,

04시40분 땅끝으로 가는 버스를 타기까지 무려 3시간10분을 버텨야 했다.

 

 

 

[2019년6월1일 02시25분 광주 유·스퀘어]

 

 

한번도 간적 없지만, 그 이름만으로도 그 곳에 간다는 기다림이 이는 곳들이 있다.

거제도 아지랑, 남해도 앵강만, 여수 가막만, 장흥반도 회진항 등이 그러했다.

 

해남반도, 땅끝에서 우수영으로 가는 해안지선에는 또 하나의 땅줄기가 바다로 뻗어 나갔고,

그 끝자락에 살고 있는 사람의 집들이 이룬 촌락과 포구를 어란진이라 했다.

 

 

 

[이순신트레일 35회차-시점 (전남 해남군 송지면 송호리)]

 

 

 

서나대원이 길에서 사라졌다.

거기까지로 했기에, 거기까지 간 그녀는 이제 더는 이 길에 오지 않는다.

세계수로기구에 등재도 안되는 바다를 가지고 남해니 서해니 쳐갈라쌀때 알아봤어야 했다.

 

길의 요란한 기록보다는,

무색의 걸음으로 그 길을 걸어 간 그녀는, 내가 본 남해안길 최고의 지오그래픽이었다.

 

뭣한다고, 바다를 쪼개가지고 그녀의 목적지를 앞당기는 우매한 짓들을 했는지?

남해고, 서해고, 나발이고 당장 서나대원을 데리고 온나!!

 

한반도 해안지선을 걷는 이들이여!

바다를 나누지 마라!

나누는 순간 이별이다!!

 

 

 

 

 

남해안길종주대가, 서해안길개척종주대로 업그레이드가 되어 걷는 첫번째 회차이다.

 

떠난 서나대원을 대신해 내가 종주대를 서퍼트해야하고,

여전히 인터넷산방을 매개체로 한 종주대는 길의 시작을 축하한다는 미명하에 회식형대원들까지 끌고 왔다.

 

 

 

 

 

 

 

 

 

출발 전, 한 때 열일곱까지 불어나 이거 이거 길에 집중에 되겠나~ 싶었지만...,

 

나이 오십을 쳐넘기고 지 일정에 지가 발목이 잡히는 불쌍한 삶을 사는 사람들의 속출로,
막상 당일이 도래하자 그 수는 열셋으로 줄었고, 

그 마저도 1박2일 56km의 길에서 열둘 열하나 열로까지 줄었다.

 

 

 

 

 

 

 

 

 

남해안길과 서해안길은,

1일차 ±30km, 2일차 ±20k를 걸어 얻어진 마디들을 이어붙인 종주길이다.

오로지 길의 이음이 목적으로 존재할뿐이다.

노량대교가 개통된 몇일 뒤, 

비를 맞으며 그 다리를 건너 남해도를 빠져나오고도 부족해 섬진대교를 건너 광양만까지 갔다.

 

가끔 참석을 하는 태양형님은,

빗물이 들어간 신발을 신고도 47km 당일의 트랙 전부를 다 걸었다.

그 날 저녁, 나는 카드를 긁지 않을 수가 없었다.

 

 

 

 

 

 

 

 

 

 

 

간조인지? 만조인지? 내 알바는 아니고..., 

쳐걸을 수 있어 해안지선 7.4km를 걸어 중리마을 앞바다에 이르렀다.


경추 3~6번까지가 아프신 레인저형님께서 목침을 배고 정자에 누워 계신다.

그 모습에 '레인저형님 ㅋㅋ~' 하면서 실실 웃음을 쏟아냈다.

나는 미친놈이다.

 

 

 

 

 

 

 

 

 

 

 

해남군 역시도 고흥군에 버금가는 상당한 면적을 가지고 있다.

관할면적이 넓다는 것은 행정력의 한계가 분명 있다는 것이다.


땅끝에서 엄남으로 오는 해안에는,

당초 야심차게 설치된 데크탐방로가 있었지만, 

파고에 의한 훼손으로 되레 탐방의 방해시설물로 산화된 채 방치가 되고 있었다.


중앙정부의 예산지원 기준이,

상주하는 인구에서 때론 관할지 면적에 비례 되어야 함도 맞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엄남마을 해안도로]

 

 

 

 

 

 

숙소로 정한 한솔모텔에 등짐의 반을 내려놓고 다시 길로 나섰다.

 

솔직히 바다꼬라지는 원래 못생겼고, 

더하여 밀려 온 쓰레기에 버려진 쓰레기들까지 합세한 해안에서는 악취가 진동을 했다.

 

 

 

 

 

 

 

어란진입구에 위치한 편의점앞 노상에서 점심을 먹었다.


오뉴월 뙤약볕에서 펄펄 끓는 라면으로...,

물론 맥주도 막걸리도 다 마셨지~

내가 총무이니 술은 제한이 없다!

 

 

 

어란진항

 

 

어란진항을 둘러 대열이 어란반도를 빠져 나갈 때, 잠시 대열을 이탈 했다.

 

 

 

 

 

[어란당집]

 

 

 

 

어란포 바닷가 언덕에는 '어란당집이 숨어 있다.

그 이야기가 픽션이던 논픽션이던 나는 상관치 않는다. 

명량해전 이튿날 어란포 앞바다에 여인의 사체 한구가 떠 올랐다.

 

명량대첩 이틀전 1597년 9월14일 난중일기에는,

어란진에서 있었던 일로,

김중걸이 왜에 붙잡혀 왜선에 감금 되었을 때, 김해인이 결박을 풀어주며 기밀을 제공했다,는 내용이 있다.
조선왕조실록 '선조30년(1597년)에는,

이순신은 왜선 중에서 여인으로부터 정보를 탐지하여 곧장 장계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설화는 이렇다.
왜장 ’칸마사가게(管正陰)에게는 어란이란 연인이 있었다.

수 많은 전쟁을 통해 그가 득한 유일한 전략은 누구도 믿지 않는 불신이었다.
명량대첩을 앞둔 그는 해전에 대한 두려움으로 취중 어란에게 출병의 정보를 발설하고 말았다.

이는 곧 자신의 신념인 불신을 스스로 깨트린 것이었다.
명량대첩에서 연인 칸마시가게가 죽었다는 소식을 접한 어란은, 여낭터 절벽에서 바다로 뛰어내려 생을 마감했다.

어란진에는 어란당집이 있고,

난중일기에 나온 '김해인이 어란이라는 지역 사학자의 주장에 왠지 수긍이 갔다.

 

당항포에 갔을 때, 들은 월이의 임란 야사와는 차원이 다른...,

 

당집을 보고 길로 내려오니, 

마을 주민분이 지나가며 어란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자 했으나, 각설을 시키고..., 

'사실이었다고 생각을 하시냐' 물어니, 사실이었다고 생각을 한단다.

그럼 됐다.

 

그나저나 대열을 우째 찾아 쫒아가노...,

 

 

 



 

기나오고, 기들어가고..., 

그런 지형에서 대열을 추종한다는 것은, 더운 오후에 할 짓이 아님을 떠나 불가능한 행보였다.

 

어란당집을 같이 간 무명초형님께서 처음 루트를 꺼내었고, 그 루트를 따라 우근방조제를 향했다.

도중 외정마을 정자에서 십여분을 잤다.

 

 

 

[무명초형님]

 

 

 

 

형님의 걸음과 길에 대한 열정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고, 더 걷게 됨에도 전혀 상관이 없는 분이다.

 

그런 형님이었는데...,

최근의 길에서는 가끔은 지친 표정을 보이시곤 한다.

 

아마도...,

걷는 길에 펼쳐진 바다꼬라지는 개판이고,

전라도 생선회는 매번 기대치를 저버리니 지쳐셨는지도 모르겠다.

 

 

 

[우근방조제에서 쳐자빠져 바라 본 바다]

 

 

우근방조제에서 한참 동안이나 대열이 나타나기를 기다렸다.


당췌 어디를 돌고오는지...,

패잔병의 꼴로 전원 입은 있는대로 다튀어나와 있었다.

 

 

 

 

 

 

 

1일차 계획한 종점은 송평항이었지만,

늦은 출발과 리아스식해안과의 사투에 진이 빠져, 송지천하류 송암마을에서 트랙을 껐다.

 

 

 

 

 

 

 



씻는다고 다들 바쁠 때,

모텔 앞 길가 조경석 너덜바위에 드러누워 송지면에 저물녁이 오는 시간을 보았다.


씻기 위해 트래킹을 하는지...,

그렇게 한참을 누워 있으니 일행들이 싹 씻고 나왔다.


트래커에서 여행자로 잠시 바뀌는 시간,

그 순간을 위해 이 길에 참여를 한 사람들을 위해 그래~ 또 열나게 분위기를 띄우고 열나게 마셔주자!

 

산방의 타이틀이 있어 이들의 출현을 막을순 없고,

내가 종주대에 적을 두고 있는 한, 회식을 위한 트레킹으로 그들에게 각인이 될 것 같았다.

 

 

 

 

 

 이순신길 24-1 송지천하류에서 고천암방조제 (2019.06.02) 

송공항과 방파제등대

 

 

두모방조제에 자라난 풀이 머금은 이슬을 바지가랑이로 닦아주며 2일차 직립보행이 시작되었다.

 

 

 

[두모방조제]

 

 

 

 

 

 

 

 

 

 

인간이란 생명체가 살기 위해서는,

해안에 길도 만들어야하고, 만들어진 길에 각종의 관들도 묻어야하고, 전주도 심어야하고...,

 

송평항으로 가는 길,

인간이 살기 위해서 바닷가에 만들어 놓은것들이 얼마나 조잡스러운지? 그걸 알려주는 길이었다.

 

더하여 인간에게는 이념이란 것이 있어,

해안에 산재한 녹슨 군사시설들 또한 뜨문뜨문 자리를 해 있었다.

 

이념이 사라졌는지?

방치된 군부대터를 통과하니, 그제서야 걷고 싶어지는 바닷길이 나타났다.

 

 

 

[송평해변]

 

 

 

 

 

 

 

 

 

 

송평해변이 없었다면 해남반도 바닷길은 분명 잊혀졌을 것이다.


 

 

 

 

 

 

 

이번 회차 최고의 바닷길은, 

송평해변에서 구성리의 작은 만(灣)을 돌아 관동방조제로 가는 길이었다.

 

 

 

[관동방조제]

 

 

관동방조제를 지나, 명성으로 가는 관두산 임도길에 접어 들었다.

 

3.2km 좁다란 오솔길 하나를 다 걷고나면 오늘 길의 끝도 가늠이 될터이지만, 

조금식 지쳐오는 기분은 어쩔 수가 없었다.

 

 

 

 

 

 

 

 

 

믹스커피스틱 다섯개를 물병에 넣고 마구잡이로 흔들었다.

드립커피 못지 않은 맛이 났고, 그 맛을 촉매 삼아 명성마을로 내려섰다.

 

 

 

[명성마을 앞바다]

 

 

 

 

 

 

 


앞서 가는 사람들, 뒤쳐져 오는 사람들, 그 중간에서 오도가도 못하는 나...,

뒤에 오는 사람들을 기다렸다.

 

그런 다음, 축지법을 사용했다.

그러고나니 길의 끝은 코앞이었다.


 

 

 

 

 

 

 

 

 

[이순신트레일 35회차-종점 (전남 해남군 화산면 가좌리)]

 

 

11시58분, 25.8km를 걸어 화산면과 황산면이 갈리는 고천암방조제(화산면측)에 도착을 했다.

 

그대로 쳐자빠져 울돌목으로 흘러가는 바닷물을 보았다.

달포가 지나면 나도 저 물살들처럼 울돌목으로 흘러가겠구나!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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