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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상이 될 길의 기록

넓은 벌 동쪽끝으로 - 옥천구읍 정지용생가 & 육영수생가 본문

고을탐방 - 한국유랑길

넓은 벌 동쪽끝으로 - 옥천구읍 정지용생가 & 육영수생가

경기병 2023. 8. 30. 12:48

지난주 업무와 관련해,

충청북도 옥천군의 담당주무관과 몇 차례 통화를 하게 되었다.

 

초임의 티가 조금 있었지만,

명랑하고 귀여운 말투에 저런 딸 하나 있었음..., 하는 부질없는 바램마저 들었다.

 

 

일요일,

오늘은 또 어디를 서성여야 하노, 고민을 하다가...,

그 주무관이 살고 있는? 옥천이나 한 번 가 볼까? 싶었다.

 

 

 

넓은 벌 동쪽끝으로 - 옥천구읍 정지용생가 & 육영수생가 (2023.8.27)

정지용 시인의 생가 앞

 

 

넓은 들 동쪽끝으로 옛 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고,

얼룩백이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한반도 중부내륙에 위치한 옥천을 가고자 11시30분쯤 엄마와 함께 집을 나섰다.

 

 

 

 

추풍령휴게소 (서울방향)

 

경부고속도로 금강나들목

 

옥천군 농어촌버스 541번

 

 

경부고속도로 금강나들목을 빠져나와 만난 옥천군 농어촌버스 541번을 따라,

14시10분쯤 옥천구읍 한가운데 자라한 시인의 늙으신 아버지가,

엷은 조름에 겨워 짚벼개를 돌아 고이신,

정지용생가에 도착을 했다.

 

 

 

 

 

 

 

 

시인의 시구와 같이 펼쳐진 고즈넉한 풍경...,

 

닿자마자 참 좋더라~

 

 

 

 

 

 

 

 

 

 

무턱대고 왔지만,

어디로 가는지 알지도 못한 채 따라 온 엄마는 '여가 거네'라 하였다.

 

 

 

 

 

 

 

 

 

 

 

 

 

 

 

일제강점기,

지역 유지들의 자식들은 엄청난 고학력을 쌓았지만,

시대는 그들의 고학력을 받아들일 일자리를 마련하지 못했고 대부분은 글을 썼다.

 

춘천에 가니 김유정이 그러했고,

옥천에 오니 정지용이 그러했으리라, 그런 짐작이 들었다.

 

 

 

 

 

 

 

 

 

 

 

모두들 고향은 있지만,

그들은 고향을 향수로 돌리고 서울로 떠나버렸다.

 

 

 

 

 

 

 

 

 

14시35분,

정지용 생가에서 600m쯤 떨어진 고 육영수 여사의 생가로 왔다.

 

근데...,

생가의 규모가 대궐이다.

 

 

 

 

 

 

 

 

 

 

 

 

 

 

 

육영수 생가로 간다고 하니,

엄마는 '그 집 아흔아홉칸이다'라 했고, 나는 반신반의 했다.

 

허나 막상 생가로 들어서니,

박정희 땡 잡았네! 그 말 밖에는 나오지 않았다.

 

아니, 이래 잘 사는 집 규수가,

왜 재처의 자리를 마다하지 않았는지?

박정희의 구애가 없었다면 이 좋은 집에서 만수를 누렸을 텐데..., 그런 아쉬움이 일었다.

 

 

 

 

 

 

 

 

 

 

 

 

 

 

 

시전잡배들도 그리는 않는데,

작금의 대한민국 정치인들은 상대의 처,자식까지도 그 공격을 마다하지 않는다.

지 마누라 지 새끼가 씹히는 꼴을 보면서도 정치를 해야하는 이유는 비열하기 때문일 것이다. 

 

각설하고,

대한민국 최고의 영부인은 그 모든 면에서 누가 뭐래도 육영수 여사였다.

 

육영수 여사님의 명복을 빌며 15시10분쯤 생가를 나왔다.

 

 

 

 

 

 

 

 

 

 

 

좀 근사한 점심을 먹고자,

옥천 신읍을 헤메이다 결국은 구읍으로 돌아와,

 

당췌 무슨 맛으로 먹는지 모를 도토리묵을 한 사발씩 먹고,

포도가 또 제철을 맞았기에 포도축제가 한창인 영동읍을 향해 16시쯤 옥천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