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상이 될 길의 기록
겨울산 - 황매산군립공원 본문
언제부터인가 늙어짐을 익어짐이라고 들 했다.
익어간다는 것은 다됐음을 암시하고,
익어버리면 끝임을 망각한 그 철 없는 은유에 터진 홍시의 처참한 형상만이 떠올랐다.
일어난 일요일 오전,
시계를 보니 11시가 넘었고, 엄마는 이불을 덮고 새록새록 잠이 들어 있었다.
방바닥이 뜨거워 그런지, 요를 깔고 자고 있는 엄마를 보니 한참 익어가고 있는 것 같았다.
안 돼!
엄마를 깨워 당장에 집구석을 박차고 나섰다.
겨울산 - 황매산군립공원 (2022.12.11)
12시30분쯤,
더 이상 늙으면 안되는 엄마를 데리고 세월이 보란듯이 집을 나섰지만 막상 갈 곳이 없다.
오늘은 또 어디를 서성이다 해가 지기를 기다리노...,
인생사 일요일 오후의 주제는 언제나 하늘보다 더 공활한 넓이에서 찾아야 한다.
오늘 역시도 해를 따라 가기로 했다.
갈 곳이 없는 날은 무작정 해를 따라 가면 된다.
해를 따라 가다 배가 고프면 밥을 먹고, 해가 지면 집으로 돌아오면 그만이다.
엄마의 점심시간은 14시30분,
14시에 나타난 톨게이트는 군북이었다.
밥이 보약이다는 말을 실감하는 요즘이다.
약의 놀아나는 베이스는 무조건 밥이다.
약이 병을 치유한다면 섭취하는 음식은 병을 이기는 근원이다.
엄마는 잘 먹으면 무조건 오래오래 산다.
요즘 내 카드의 사용처는 주유소와 식당 그리고 병원과 약국이 대부분이다.
익지 않으려 일요일 오후에 집을 나와,
기름값 오만원 긁고 점심값 삼만사천원 긁고..., 그리고 하늘을 본다.
황매산이나 올라가까?
16시쯤,
봄이면 철쭉이 가을이면 억새가 만발하는 황매산 정상주차장에 올랐다.
어찌나 바람이 처부는지,
엄마는 차에서 내리지도 못하고 나는 주차장을 서성이며 회상이 된 세월을 찾았다.
별을 보러 갔다가 밤새 비만 두들겨 맞은 날이었다.
바람 때문에 데크사이트를 대신해 주차장 귀퉁이에 차를 외벽삼아 텐트를 치고,
텐트를 두드리는 빗소리가 좋아 밤새 술을 마신 밤이었다.
다음날 아침,
지금은 철쭉과 억새 사이로 변한 매점에서 라면에 막걸리를 마셨고,
정상을 올랐는데도 술이 깨지 않아 하루치 야영비를 더 지불하고 저녁무렵에서야 산을 내려올 수 있었다.
회상이 된 그 시절이 그리운 것은 사실이지만,
회상이 될 오늘은 엄마와 함께 왔기에 그 그리움 따위는 이제 지울란다.
겨울 일요일 오후는 늘 한적하다.
섬도...,
산도...,
겨울, 비워진 황매산 하늘가에 있다.
날은 저물어 가고...,
엄마는 집에 가자고 하고...,
겨울, 그 진함의 풍경..., 좋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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