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상이 될 길의 기록
등대기행 31 - 녹산곶등대 본문
사람들이 녹산등대라 부르는,
거문도 서도 최북단 곶에 서 있는 등대의 정확한 이름은 녹산곶등대이다.
곶, 말, 단, 포의 설레이는 지형에는 등대가 서 있고,
등대 이름 끝음은 등대가 서 있는 지형을 나타내기에 반드시 그 이름을 왜곡하지 말아야 한다.
동도와 서도를 잇는 거문대교에 올라서니, 등대가 보였다.
사실은 거문도 해역에 여객선이 들어서니 녹산곶에 서 있는 하얀 등대가 보였고, 그 자태에 이미 반했다.
등대를 마주하니 세상이 다 아름다워지더라~
더워도 상관이 없다.
나는 세상에서 가장 예쁜 등대를 지금 만나러 간다.
등대기행 31 - 녹산곶등대 (2020.6.20)
아리랑길을 시작하면서 거문도는 매번 탐방의 대상이 된 섬이었고,
등대기행을 시작하면서는 필히 가야 할 섬이었다.
여수에서 뱃길로 2시간30분이 소요된다길래 선뜻 나서질 못했고,
의지가 불 붙은 날 입도를 시도했지만, 바닷길을 숨긴 해무에 돌아서기도 했다.
신록이 푸른 유월에 거문도로 와 녹산곶등대와 마주하니, 아직도 내 생은 푸르더라~
지난 5월23일 강원권역 4등대 탐방후 4주만에 떠나 온 길이다.
한 동안 무기력해진 나였고,
멀리 떠나지 않는다면 더 이상 걸을 길이 근동에는 없는 처지였다.
배낭에 든 500ml 생수 두병에 기온은 급상승을 했지만, 가고픈 길로 들어서는 마음에 걱정 따위는 없었다.
등대로 가는 길은 오름이었지만, 이런 오름이라면 하늘까지도 오르겠다.
유월의 신록은 햇살마저 풍경으로 만들었다.
나는 그 신록을 누비며 등대로 간다!
녹산곶등대로 가는 길에는,
하늘과 바다와 언덕 그리고 신록을 뜯고 있는 염소 두 마리 밖에는 없었다.
같이 배를 타고 온 이들은 단 한 사람도 보이지 않았다.
이 좋은 거문도의 유월은 내팽개치고, 또 배에 태워져 인근의 백도로 끌려갔을 것이다.
본 선 잠시뒤 파도가 거친 수역을 통과하겠..., 초도를 지나자 선내 방송이 흘러 나왔다.
배가 요동을 치니 승객들이 괴성 대신 환호성을 지른다.
떼거지 투어팀들이었다.
그 소란한 틈에도 의연하게 앉아 있는 승객들은 짐작컨데 거문도 주민분들이었다.
목장갑 한무더기를 곁에 두고 앉은 할머니께 요구르트 한병을 따 조심스레 건네니 몇 모금으로 나눠 마신다.
여수 병원에 갔다가 돌아가는 길이라 하셨고, 이래도 내가 팔십일곱이라고도 하셨다.
자는 것 같아, 엄마에게 갔다온다는 말도 않고 집을 나왔다.
여섯시쯤 엄마에게서 전화가 왔다.
이런 저런 나를 향한 걱정의 말들을 쏟아내는데...,
내가 나이가 몇살인데, 그냥 잘 갔다온나 하면 되는걸 가지고..., 그렇게 전화를 끊었다.
서도의 북단으로 난 길에서 갑자기 집에 있는 엄마 생각이 났다.
미친놈이 나이가 처들어도 시근이 안생기니, 풍경이 사람을 철들게 했다.
땀이 송글송글, 배가 꼬르륵꼬르륵...,
초승달에 걸터앉은 인어아가씨에 기대어 원 없이 바다바라기를 했다.
10시57분, 녹산곶등대에 닿았다.
한번뿐인 생이어서 좋았고, 그 생에서 딱 한번만 올 등대에 왔음에 더 좋았다.
한번을 더 오게 되면, 한번뿐인 생은 아쉬워질것임에...,
등대가 만들어 놓은 그늘에서,
데워진 캔맥주를 끝까지 다 빨고, 한 십분여를 처자빠져 있다가...,
11시20분, 내 생에 다시는 오지 않을 녹산곶등대를 내려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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